제목 : 계성서 첫 유도 수업… 향토 체육계 거목 등록일 : 2005-05-23    조회: 1041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계성서 첫 유도 수업… 향토 체육계 거목

신도환 10단·오영모 9단 등 제자 길러내
경대에 체육과 신설 등 굵직한 업적 남겨
80세 제자에 절 받고“자네들도 영감인데…”

최 영 호 경북대학 명예교수 <1934∼1946 모교 체육교사>


지난 4월 21일 오전 11시, 황사 현상이 있었지만 봄바람이
한결 상쾌한 이날, 회보팀(이수남·남기진)은 석남수(35회) 자
문과 권수보(38회) 자문을 모시고 수성구 지산동 녹원아파트로
우암(愚巖) 최영호(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흰머리에 굵은테 안경을 쓴 선생님의 모습은 좋아보였다. 탁
트인 거실의 창너머로 짙은 녹색의 화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까
이 보였다.

<계성 뱃지> 도안자로, 한때 <최띠이>로 계성은 물론, 대구
시민에게 회자되었으며 향토 체육계의 거목이었던 선생님도 세
월(95세)은 어쩌지 못하시는지 다소 불편한 거동으로 일행을
맞았다. 통 큰 기개와 우람하고 당당하던 옛모습도 스러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진작 찾아 뵙고 싶었는데 집을 몰라서 죄송합니다. 오늘 권
수보 자문이 연락해서 같이 왔습니다. 저도 몸이 좋은 편은 아
니나 오늘 선생님을 뵙고 보니 정말 반갑고 기분 좋습니다.」
최영호 선생께 큰 절을 올리며 석남수 자문이 말했다.

「제 아이 혼사 때 뵙고는 오래 된 것 같습니다.」
권수보 자문도 인사했다. 그러자 최영호 선생은 석남수, 권
수보 자문을 보시며 <자네들도 영감이 다 됐구나> 하시며 웃었
다. 석남수 자문이 준비해 온 금일봉을 선생님께 드렸고 최영호
선생님은 <여보, 이것 보소> 하며 다과를 준비하는 사모님을
찾았다.

「우리는 60년 전 제자입니다.」하며 사모님 이원복(異原福)
명예 권사님에게도 큰 절을 했다.

「요즘 나는 쇼파에 앉아 TV 보거나 책을 보는데 건강상 독
서는 오래 못 해.」

그러자 권사님이「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지요. 맨날 계성 이
야기만 합니다. 나하고는 6년 차인데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보행에 불편을 겪고 있어 내가 없으
면 안 돼요. 산책도 내가 부축해서 하지요.」했다.

그러자 선생님은「너무 흉보지 마소.」하고는 허허 웃었다.
그러는 최영호 선생님을 향해 석 자문은「선생님 팔자는 대한
민국에서 최고 아닙니까?」했다.

1911년 1월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한 선생님은 대구고등보통
학교(1932)와 일본체육전문학교(1934)를 졸업하시고 그 해 4월
김천고등학교에 잠시 근무하다가 7월, 계성학교 교사(체육)로
부임했다.

「내가 그 때 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치려고 하니까 헨더슨
교장은‘왜 일본 운동을 가르치려고 합니까? 야구를 가르치시
오.’라고 했어. 그러나 나는 내뜻을 관철시켜 계성에서 유도를
시작했지.」

그 결과 최고제자 신도환(유도10단) 선생을 비롯, 오영모(9
단) 선생 같은 우리나라 유도계의 거목을 길러냈다.

「내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계성학교 학생들에게 유도를 지
도해서 서울대회에 가서 10년간 우승했다는 일이야. 시골 학교가
계속 우승한 것은 그 당시 전무후무한 일이자 내 보람이기도
했어. 그 때 계성은 유도는 물론이지만 모든 운동을 다 잘 했
어.」

처음 수제자 신도환 선생은 유도를 무단히 싫어했다. 대신
육상을 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신명학교 여학생들 보는 데서
달리기 하는 것이 그렇게 보기좋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최영호 선생이 신도환 학생을 유도장으로 데려 오려고 가면
도망가고 도망가고 해서 나중에 숨어 포복까지 하는 작전을 쓰
면서 까지 끌고 와 유도를 가르쳤다. 이때도 신도환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아 최영호 선생님한테 <징>이 박힌 슬리퍼로
많이 맞기도 했다.

「그 때 계성학교가 체육대회를 하면 대구에서 이름났지. 시
내는 물론이고 먼데서 까지 구경왔으니까. 내 머리(아이디어)
로 꾸미고 했는데 행사 내용이나 규모가 커서 전 시민의 관심
을 끌었어. 내가 젊었을 때는 참 대단했지.」

그러자 석남수 자문이「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을 보고 겁을
내었으나 나는 안 그랬어요. 그때 나는 체육점수 100점을 받았
는데 선생님이 잘 봐줘서 그랬지요.」했다.

석남수 자문이 100점을 받은것은 체육 부장이자 응원 단장
이기도 해서 성적도 좋았지만 공로를 참작해서 였다고 한다.
최영호 선생님은 헨더슨 교장과도 인연이 많다. 대구 서성로
중앙교회에서 헨더슨 교장 주례로 결혼식도 올렸다. 27세 때 였
다. 결혼식은 당시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계성학교 60주년 때 인가 김포 공항에서 헨더슨 교장을 만
났어. 그래서 내가‘선생님 저 알겠습니까?’했더니‘그래 내
가 주례까지 했는데 몰라?’하시더군.」

결혼에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나중 처남이 된 이완일씨
가 재학시절에 장인되실 분이 시내 군방각에 전 교사들을 초
청 접대하다가 <계성학교에 누구 총각선생 없나?>했고 당시
유일한 총각인 최영호 선생과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한
다.

이원복 권사는 이화여전 교육과에 합격했으나「이화는 사치
가 심하다」라는 부친(서울의전 졸업, 안동 영생병원장)의 제지
로 경성여전을 졸업했다.

선생님은 향토 체육계에 굵직한 업적을 남기셨다. 사범대학
부설 체육과 중등교원 양성소창설, 경북대 사범대학에 체육과
신설, 경북 체육관 건립 추진위원회 부회장, 경북체육회 창설,
대구 공설운동장에 시멘트 스탠드 설치 등으로 문화포장(61, 국
가재건 최고 회의장), 문화포장(62, 대통령권한대행), 제 1회 체
육상(63, 문교부) 등을 받았고 1954년 유도 8단증(대한연무관)
을 수령했다.

헬싱키 올림픽(1952년) 당시 조사연구원으로 파견된 적이 있
는 선생님은 70년대 후반 가족이 연관된 일로 당국에 의해 고
초를 겪은 일이 있었으나 신도환 선생이 법정에서「내가 반공
청년단 단장을 지낸 사람이고 최영호 선생은 내 은사이자 성
격도 사상도 잘 안다.」고 적극 보증하여 무난히 나오게 된 일
도 있었다. 신도환 선생을 계성학교에 오게 한 것도 최영호 선
생님이었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
직을 했고 차남은 미국 보스턴에서 의사로 있고 둘째 사위는
효성병원장, 셋째 사위는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있다.

「마음 걱정이 없으니 얼굴이 저리 좋지요. 그러나 지금도 잘
못하면 소리칩니다.」고 권사님이 말하며 웃는다. 10년전부터
정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방 하나를 체육실로 만들어 미국의
차남이 보낸 운동기구로 매일 무릎관절 운동을 하고 있다.

연세가 많아 기력이 쇠잔한탓으로 몇 가지 준비한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하고 나올 수 밖에 없는 점이 아쉬웠으나 <95세 스
승과 80세 제자>의 만남과 80세 제자의 큰 절은 좀체 보기 어려
운 계성만이 연출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임에는 분명했다.

글·이수남(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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